비극의 귀국선 우키시마호 사건, 그 진실은?
폭침 68년, 원인·희생자 수 못 밝힌 채 아직도 힘겨운 진행형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일본 교토 북쪽 마이즈루[舞鶴] 만에 있는 작은 군항 시모사바가[下佐波賀]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浮島丸·4,730톤]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바다에 갈아 앉았다.
▲ 2012.8.24 일본 마이즈루 만 시모사바가에서 열린 우키시마호순난자 위령제에 참석한 인사들이 바다에 위령헌화하고있다.<주일 한국교육원>
이 선박은 태평양전쟁 중 이른바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 북쪽 끝 아오모리 지역에서 비행장 건설 등 강제노동에 투입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한국인 노동자(이하 한인)와 가족들을 가득 태우고 부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폭침 사고 후 일본정부는 ‘100톤 이상 선박의 항행을 금지하며 목적지에 갈 수 없는 선박은 가까운 항만에 입항하라.’는 연합국의 항해금지령에 따라 부산으로 가던 항로를 마이즈루 항으로 변경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폭발 원인은 연합군이 설치해놓은 기뢰에 접촉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한인 승선 인원 3,735명(일본 해군 255명) 중 사망자는 524명(일본 해군 25명)이라고 발표했다.
그 후로 항로 변경 이유, 폭침 원인, 승선인원과 희생자 수에 대해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고, 사실을 규명하려는 활동도 끊임없이 전개되었으나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한 가운데 일본은 묵묵부답이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68년이 흘렀다.
▲ 출항에서 폭침까지
1945년 8월 19일, 일본 해군성 수송본부의 우키시마호 운항 허가를 받은 오미나토[大湊] 해군 경비부는 출항준비를 서둘렀고, 현지 한인과 가족들에게 ‘부산으로 가는 귀국선은 이번뿐이다.
▲ 한국인 귀국선 우키시마호의 예정항로와 실제항로
승선하지 않는 조선인에게는 배급을 주지 않는다.’고 회유하면서 한국인들의 승선을 종용했다.
지옥 같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던 한인과 가족들은 앞뒤 살펴볼 겨를도 없이 다투어 귀국선에 승선했다.
1936년에 건조된 이 배는 길이 108.4m, 폭 15.7m, 총톤수 4,730톤, 항해속도 16노트의 수송선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해군에 징용된 선박이다.
8월 22일 밤 10시경, 어둠을 뚫고 오미나토 항을 출항한 우키시마호에는 많은 한인이 승선해 식수 공급이나 용변처리가 어려울 정도로 비좁았지만,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대감에 들떠 불편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항해 이틀 후인 8월 24일, 우키시마호는 항로를 변경하여 목적지 부산이 아닌 마이즈루 만으로 들어섰고, 오후 5시 20분경 시모사바가 앞바다 300m 지점에서 원인모를 폭발로 두 동강으로 갈라지면서 침몰했다.
▲ 승선인원과 사망자는 얼마인가?
일본이 한인 승선인원 3,735명(일본 해군 255명), 한인 사망자 524명(일본 해군 25명)이라고 발표하면서 이 인원수는 이른바 ‘편승자 명부’와 ‘사몰자 명부’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하지만, 아직 이 명부를 제시하거나 존재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대로라면 생존자는 한인 3,211명(일본 해군 230명)이 된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실지 승선인원은 7천 명이 넘고, 사망자는 3천 명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우키시마호의 객실은 장교와 군인들의 거처로 점유되고 한인들은 탄약고와 기관실, 갑판, 창고 등에 탔다. 배 밑바닥에는 배의 균형을 유지하는 자갈을 싣고 그 위에 널빤지를 덮었는데 거기에도 한인들이 빈틈없이 탔다.
당시 승무원이었던 하세가와 모토요시[長谷川是元] 이등병조는 “나는 6천 명이나 8천 명이라고 들었다.”고 말했고, 조타장이었던 사이토 츠네지[齋藤恒次] 상등병조는 “우키시마호가 세이칸[靑函] 연락선과 대체했을 때 배 밑바닥에 4천 명을 태운 적이 있는데, 오미나토 항에서 탄 조선인은 사람이 더 탈 수 없는 정도여서 그보다 2천 명은 더 많았을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최소한 6천 명 이상 승선했다는 증언이다. 이 중에서 생존자 3,211명을 제하면 사망자는 2,789명이라는 계산이 된다.
일본이 말하는 ‘사몰자 명부’ 작성 시기는 9월 1일이었다. 사고 발생 7일 만에 사망확인서, 호적말소통지서 사본이 첨부된 사망자 명부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바다에 가라앉았거나 선체에 갇혀있는 유해가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은 시점이고, 전 가족이 사망했거나 독신자가 사망해 신고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항로 변경 이유와 시점은?
‘100톤 이상 선박은 항행을 금지하고 가까운 항만에 입항하라.’는 연합국의 항해금지령에 따라 항로를 마이즈루 항으로 변경한 것이라는 일
▲ 일본 마이주르 만에서 침몰한 일본해군수송선 우키시마호
정부 발표와는 달리 처음 목적지가 부산이 아니었다는 증언이 있다.
부산으로 가려면 바다 가운데로 직선항로를 잡아 항해해야 하는데 우키시마호는 처음부터 왼편으로 일본의 산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연안 항로로 항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관장이었던 노자와 타다오[野澤忠雄] 소좌는 “출항명령이 내렸을 때 분명히 함장, 항해장 등 몇 사람이 도중에 어느 일본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협의했다. 작전에 관한 것은 기관장에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듣지 못했고, 도중 어느 항구에 입항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며 마이즈루 행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타장 사이토 상등병조도 “우리는 처음부터 부산에 갈 생각 따위는 없었던 거다. 배의 항로는 출항 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가 결정되면 항로를 정하고 그 항로로 운항한다.
당시 우키시마호의 항로는 부산으로 가는 항로가 아닌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항로였고 그것은 일본 어느 항구에 들어가는 항로이다. 출항 때부터 마이즈루 항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도중에 항로를 변경하는 그런 항해는 없다.”라고 단언했다.
8월 21일 발령된 연합국의 항해금지령에는 ‘8월 24일 18:00 이후 항해 중이 아닌 함선의 항해를 금지한다.’고 되어있어, 이미 항해 중이었던 우키시마호는 항해금지 대상이 아니었다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
▲ 기뢰 접촉인가, 자폭인가?
마이즈루 만에 기뢰가 많이 투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합군이 투하한 기뢰의 기폭장치는 최대 10일간 8번 작동하도록 설계되어있어, 기뢰가 마지막 투하된 8월 8일에서 10일이 지난 8월 19일 이후에는 기폭장치가 소멸되어 사실상 기뢰의 폭발위험은 없는 상태였다.
▲ 부산 수미르공원에서열린 합동위령제
▲ 일본 마이즈루 만시모사바가에서 열린 우키시마호 순난자 위령제
그동안 수백 척의 선박이 드나들었고 사고 당시에도 우키시마호 앞에 해군함정이 항해하고 있었다는 목격자 증언도 있다.
기뢰 폭발이라면 폭발과 함께 반드시 수십 미터의 물기둥이 발생하는데, 당시 승선했다가 생존한 사람들은 배가 폭발할 때 물기둥이 전혀 없었고, 3~4회 연속적인 폭발음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기뢰는 한 번만 폭발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연속 폭발했다는 것은 기뢰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의혹은 1954년 4월 24일 마이즈루 공회당에서 열린 제1회 우키시마호 순난자추도위령제에서 日·朝협회 교토부연합회 타무라 요시오[田村敬男] 씨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됐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다룬 책 <アイ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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